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자파힛 제국 (문단 편집) === 전성기 === 라덴 위자야는 1293년 11월 10일 마자파힛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자바의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하자마자 민심을 잠재울 목적으로 싱하사리 왕국의 마지막 왕 크르타나가라의 딸 4명과 모두 혼례를 치렀고, 저멀리 말레이의 수마트라계 왕국 다르마스라야 왕국과도 결혼동맹을 맺어 안정을 꾀했다. 다만 라덴 위자야는 즉위 후에도 딱히 평화롭게 살지는 못했는데, 그가 가장 신임하던 최측근 3명이 규합해 중간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나니 사실은 재상직을 맡고 있던 마하파티 할라유다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는 진상이 드러나며 2차로 충격을 받았다고. 결국 라덴 위자야는 1309년 세상을 떠났다. 라덴 위자야 국왕이 서거하자 그의 아들이자 다르마스라야 왕국의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자야나가라(자야느가라)'[* 자바어 'nagara'는 마인어로 옮겨질 때 'negara'가 되는 경우가 많다.]가 마자파힛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자야나가라의 치세는 아버지 라덴 위자야의 치세보다도 더 혹독했는데, 온갖 종류의 반란들이 나라 곳곳에서 터져나왔던 탓이 컸다. 심지어 1319년에 터진 쿠티족의 반란 때는 수도와 궁궐을 반란군들에게 빼앗기고 총신 [[가자 마다]]와 호위병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도망쳐나오는 치욕을 당할 정도였다. 참고로 능력 넘치는 신하 그 자체였던 가자 마다는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왕을 작은 마을에 숨겨놓은 다음, 수도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보고 귀족들이 반란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동원해 반란군들을 깨부쉈다. 가자 마다 덕에 수도를 되찾은 자야나가라는 그에게 감사의 뜻으로 높은 관직을 수여했다. 사실 자야나가라가 이렇게 반란에 시달리고 평이 안좋은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자야나가라는 잔혹한 인물이었고 특히 '''제 이복누이에 손을 대는 등''' 사회적으로 욕을 처먹을만한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이복 간의 근친상간을 극도로 경계하던 자바 원로회의에서는 당연히 뒤집어졌지만 자야나가라는 이마저도 무시하고 일을 벌였다고. 이복누이 뿐만 아니라 부하의 아내와 딸들에게도 손을 대서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자야나가라는 1328년 주치의 탄카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왕이 탄카의 아내를 성적으로 학대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죽였다고 한다. [[가자 마다]]가 탄카를 즉결처형했다. [[파일:tumblr_b293a01beee4cad073f7fb5065c89105_8dd310c4_1280.jpg]]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의 전성기 시절 복원 모형도.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이라 현재는 일부 벽돌탑을 제외하면 남은 것이 없다. 왕이 죽어버렸으니 원래는 왕의 계모이자 왕실에서 가장 항렬이 높은 가야트리 라자파트니가 섭정을 맡아야 했지만, 그녀가 이미 불계에 출가해버렸기에 그녀 대신 그녀의 딸 [[기타르자]]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그녀의 왕명 풀네임은 '트리부완노퉁가데위 자야위슈누와르다니'. 어쨌든 기타르자는 1336년 선왕의 총신이자 최고로 유능한 신하이던 [[가자 마다]]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가자 마다는 재상직에 임명되자마자 대외적으로 뻗어나갈 것을 천명했다. 그는 사방으로 함대를 보내는가 한편 1342년에는 직접 [[발리]] 섬을 공격해 1년 만에 수도 베둘루를 함락했다. 발리 왕을 사로잡아 죽인 가자 마다는 원정대를 보좌한 장군 아리아 다마르의 형제들에게 발리의 지배권을 나누어주고 속국으로 삼았다. 기타르자는 가자 마다의 충실한 보좌를 받으면서 1350년까지 재위하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미련없이 아들 [[하얌 우룩]]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마자파힛 제국은 하얌 우룩 왕의 재위기에 황금기를 맞는다. 재상 [[가자 마다]]가 총지휘하고, 제독 음푸 날라가 이끄는 대규모 해상원정으로 마자파힛 세력은 기존의 자바 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술루 제도]],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를 비롯,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며 그 영토가 가히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북쪽으로는 저멀리 [[필리핀]], 서쪽으로는 [[수마트라섬]]의 끝자락, 동쪽으로는 [[뉴기니섬]] 서쪽 일부까지 장악하면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해상 대제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14세기 황금기에 마자파힛 제국은 중국-동남아-인도-아라비아-튀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 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는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였으며, 자바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양의 토기, 두상, 반신상, 부조로도 당시 마자파힛의 부를 가늠이 가능하다. 번영 속에서 문화예술도 꽃피웠는데, <[[판지 설화]]> 등을 테마로 여러 장의 화려한 그림을 연속적으로 교체하며 설명을 곁들이는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극은 마자파힛 시대에 정립되었으며,[* 마자파힛 당대의 도판은 찾기 어렵지만 16-18세기의 와양 베베르 도판은 오늘날까지 남은 것이 많다. ] [[가믈란]] 음악, 각종 와양 극, 자바 무용 양식 역시 상당 부분 마자파힛 시대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 대체로 오늘날과 흡사한 형태로는 근세, 특히 [[마타람 술탄국]] 시대에 정립되고, 후계 국가들인 수라카르타 수난국과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정교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